생명윤리정책연구센터 자료

불교의 인간관과 생명윤리의 문제 (4월 26일)

회의간행물

등록일  2012.06.11

조회수  2947

- 주제 : 불교의 인간관과 생명윤리의 문제
- 연자 : 박병기 교수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 일시 : 2011년 4월 26일(화) 오후 12시 ~ 1시
- 장소 : 신촌 세브란스병원 종합관 6층 650호 교수회의실


1. ‘불교적 관점’은 무엇인가?

불교의 인간관은 인간을 바라보는 불교적 관점을 의미한다. 인간이라는 대상을 상정해 놓고 철학적 인간학 같은 인문학적 배경을 통해 접근하거나 분석해볼 수도 있고, 생물학과 같은 자연과학적 배경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이처럼 불교의 인간관도 불교라는 배경에 근거해서 인간이 누구 또는 무엇인지를 밝혀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렇다면 불교적 관점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佛敎, Buddhism)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넘어가야만 한다. 지금 우리에게 불교가 과연 무엇일까? 초파일이 다가오는 요즈음 절집 근처에 가보면 연등을 켤 준비로 분주한데, 줄줄이 달린 연등의 행렬을 보면서 현재의 우리 한국인들은 대체로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는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있다. 기독교 계통의 고등학교를 마친 필자에게 그런 행렬은 먼저 귀신을 떠올리게 했던 적도 있다. 무언가 불온하고 그래서 때로 소름이 돋게 하는 대상이었고, 그것은 마을 앞 성황당에 둘러쳐져 있던 휘장과도 유사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다른 한편 불교는 경쟁에 지쳐 쓰러져가는 우리들에게 마음의 평정을 가져다주는 마음공부의 통로로 다가오고 있기도 하다. 외국인들이 찾기 시작한 한국적인 것의 원형으로 출발한 템플스테이는 이제 국적은 물론 종교와 나이를 초월해서 쉼과 평온을 제공해주는 장으로 정착해 있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불교는 무엇인가? 회색빛 보살옷을 입은 할머니들의 간절한 염원이 곧 불교인가, 아니면 유식과 중관으로 대표되는 정치한 철학체계가 불교인가?

불교는 말 그대로 붓다[佛]의 가르침[敎]이다. 붓다는 인간이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출가(出家)했고, 오랜 수행의 결과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공(空)의 진리, 즉 다르마(dharma)를 발견했다. 공의 진리는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것들이 고정된 채 존재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것이고,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진리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우리의 일상을 관찰하고 그 심연에 숨어있는 것을 찾아내고자 하는 명상의 방법을 활용했다.

그렇게 본다면 불교는 종교이기 이전에 철학이다.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시 많은 논의가 요구되지만, 최소한 그것이 현재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일상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그것에 질문을 던지는 일을 포함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다면 불교는 당연히 철학으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고타마 붓다가 죽기 직전 제자들에게 남긴 말에서도 충분히 드러난다. 자신이 죽은 이후의 상황을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고타마 붓다가 던진 말은 ‘나를 믿으라’가 아니었다.

너 자신과 진리를 등불로 삼아라.[自燈明 法燈明]

이때 내가 스스로 의지할 수 있는 나는 현실 속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자신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있는 진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수행자로서의 나이다. 그리고 그 진리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평범한 공(空)의 진리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붓다가 열반에 든 이후에 부파불교와 남방, 북방불교 등으로 이어지면서 팔만대장경이라는 방대한 경전으로 남아 우리들로 하여금 경건함과 압박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해인사 장경각에 들어가 보면 경판 사이를 드나드는 바람의 청량감과 함께 평생을 읽어도 그 중 일부만을 볼 수밖에 없다는 좌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일종의 요청으로서의 윤회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교는 비교적 단순하다. 그것은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이고, 그 가르침이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거나 문화적 특수성이나 전통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변용되어 현재와 같은 팔만대장경 체제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적 관점은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하는 것임과 동시에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풍부하게 담고 있는 열린 관점이기도 하다.

2. 인간을 바라보는 불교적 관점 또는 불교적 인간관

가. 윤회와 해탈의 불이적(不二的) 관점

불교의 인간관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인간이 윤회와 해탈의 두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자라고 보는 지점이다. 인연의 고리를 형성하면서 이 땅에 존재하게 된 인간은 그 자체로는 윤회를 거듭하는 여섯 단계의 존재자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도 자신도 모르게 짓는 업(業)이나 알고 짓는 업에 상응하는 보(報)로 인해서 윤회의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여섯 존재자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 차별화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의 내부에 해탈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점이다. 누구나 윤회의 굴레를 제대로 성찰할 수 있게 되면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불성론(佛性論)이 불교 인간관의 또 다른 핵심을 이룬다. 이것이 선불교에 오면 눈을 들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으면 벼락같은 깨침의 순간으로 옮겨올 수 있다는 돈오(頓悟)로 이어진다.

이러한 윤회와 해탈은 그런 점에서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관계를 이룬다. 윤회 속에 해탈이 있고 해탈 속에 윤회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 속에 깨침의 계기가 숨어있고, 그렇게 본다면 일상이 없는 깨침이란 생각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상이 곧 깨침은 아니다. 일상의 어느 국면 또는 계기를 통해 깨침이 일어날 수 있고, 그 깨침이란 것도 완전하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지속적으로 닦아가야 한다는 점수(漸修)가 요청되기도 한다.

인간은 그 출발점에서 윤회를 벗어날 수 없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 굴레를 쉽게 벗어날 수 없지만,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서 어느 순간 깨친 자, 즉 붓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존재자라는 것이 불교 인간관에서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명제이다. 특히 우리처럼 북방불교의 전통 속에 있는 경우에는 이러한 인간관은 지눌이나 성철 스님의 삶과 철학을 통해 이런 명제와 비교적 손쉽게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주목해볼 만한 관점이다.

나. 사람에 대한 ??율장(律藏)??의 정의

불교 경전은 경율론(經律論)이라는 삼장(三藏)의 구조로 되어 있다. 경은 부처님 말씀을 담고 있는 말 그대로 경전이고, 율은 붓다 생존 당시에 이미 형성된 승가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제정된 계(戒)와 율(律)을 담고 있는 경전이다. 논은 경이나 율에 관련된 다양한 주석이나 논의를 담고 있는 것으로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같은 것을 지칭한다. 불교윤리는 기본적으로 붓다의 말씀을 근거로 이끌어낼 수 있는 윤리 규범을 의미하기 때문에 삼장 중에서도 경에 더 주목해야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승가공동체를 전제로 하여 구체적으로 작동했던 계율을 담고 있는 율장도 중시해야만 한다.

율장에는 사람에 관한 구체적인 정의나 규정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을 두 가지만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란 처음의 식(識)에서 마지막 식에 이르기까지를 말한다.

이러한 정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 보면 결국 인간이란 모태에서 최초의 마음[識]이 생겨난 다음부터 시작해서 죽음에 이를 때까지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 정의는 인간의 존재성을 기본적으로 시간적 차원에서 규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간적 차원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몸이 있는 이상 그 몸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의 확보는 필연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공간의 범위와 층위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서 차별화될 수 있을 뿐이다.

생명윤리의 문제와 관련지어 흥미롭게 볼 수 있는 또 다른 인간에 대한 규정이 율장에 있다. 그것은 ‘인간과 유사한 존재’ 곧 사인(似人)이다.

사인(似人)이란 모태에 들어간 이후 49일까지이고, 이 기간이 지난 후에는 모두 인간이라 한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부모 사이의 교합과 모(母)의 생식가능 주기, 식(識)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 불교에서 인간 생명의 시작을 바라보는 일반적 관점이고, 북방불교에 오면 이때의 식(識)이 중음신이라는 이름이 바뀌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된 수정란이나 배아 자체는 온전한 인간이 아닌 ‘유사인간[似人]’이고, 49일이 지난 후에야 온전한 인간이 된다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유사인간이라고 해서 함부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인간으로 바로 이어지는 전 단계의 존재자라는 점에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지만, 최소한 수정란이나 배아를 온전한 인간과 동일하게 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 불교 인간관의 특징이다.

3. 불교 생명윤리와 연명치료의 문제

불교 생명윤리는 불교윤리의 실천적 국면을 포괄하는 개념이면서 그 초점을 생명에 맞추고 있는 일종의 응용윤리이다. 생명 현상이나 생명체에 해당하는 불교의 개념은 중생(衆生, sattva)이다. 중생의 어원을 찾아가 보면 산스끄리트어의 존재자(sattva), 즉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지만, 이것이 구체화되면서 중생은 다시 범부(凡夫)와 유정(有情) 등으로 나뉘는데 유정은 말 그대로 감각적 수용 능력을 가지고 맹목적 삶의 의지에 따라 행위 하는 존재자를 가리킨다. 오늘날의 생물 개념과 가장 가까운 것인데, 그러한 유정물은 감수성(情)과 의지성(行), 행위성(業)을 가진 존재자이다. 범부는 깨닫지 못해서 윤회의 삶을 살아가는 보통의 인간을 가리킨다.

불교 생명윤리학은 이와 같은 중생, 즉 범부와 유정물을 포함하는 생명체 또는 생명현상을 주된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의지나 행위의 기준을 문제 삼는 윤리학적 논의이다. 이들의 삶의 지향 중에서 인간이 지니는 특징은 그가 범부라고 할지라도 깨달음의 가능성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존재자라는 점과 유정물과 같은 다른 존재자들을 향해서 동체자비(同體慈悲)의 윤리적 자세를 보여주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는 존재자라는 점이다. 동체자비가 의무인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유지해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다른 인간은 물론 유정물과 무정물 같은 다른 존재자들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주된 관심의 그 의지 또는 의존은 단순한 생존을 위한 수단의 차원을 넘어서서 아예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본질적 차원의 문제이다.

인간을 포함한 존재자들은 모두 다른 존재하는 것들과의 연기적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그 존재가 가능해지고, 그 관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空)의 진리 속에서 작동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연기적 관계에 대해 충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만, 일상의 범주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은 늘 자신만을 생각하면서 타자와 자신 사이에 구별 짓기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 상처는 곧 자신의 것이기도 함을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불교 생명윤리는 바로 이러한 연기성(緣起性)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해서 다른 사람을 나와 구별 짓지 않는 동체자비의 윤리로 이어진다.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따라서 다른 이유 없이 단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자임을 석가모니 붓다는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생명은 타자와의 의존을 통해서만 존속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그 의존성과 의존성으로 말미암아 빚어지는 공성(空性)을 자각하는 일이 곧 깨달음이고, 그렇게 되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해탈의 세계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붓다 가르침[佛敎]의 핵심이다. 질병 등으로 죽어가는 인간에게 그 생명의 존속 시간을 연장시켜주는 장치를 달아주는 일은 그렇게 보면 공성(空性)에 대한 철저한 자각에 어긋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태어나고 자라서 후세를 낳아놓은 후에는 병에 걸려 죽어가는[生老病死] 당연한 과정을 거치게 되어있다. 죽는 순간을 의연하게 맞아야 하는 이유이고, 그 의연함이 깨침의 정도를 드러내는 척도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통 받는 생명체를 도와주는 일은 그 고통이 곧 나와 분리되지 않는 존재자의 고통이라는 점에서 자비의 윤리에 합당한 일이 된다는 점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능하다면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 곧 자비행(慈悲行)이다. 다만 그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고 단순히 생물학적인 숨쉬기만 가능한 상태에서 연명치료를 하는 일은 인간 삶의 자연스런 흐름에 역행하는 업(業)을 짓는 일이 된다는 것이 불교적 관점에서 연명치료를 바라보는 입장일 것이다.

불교의 인간관과 생명윤리의 문제(최종원고, 박병기. 한국교원대, 2011.4.26).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