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윤리정책연구센터 자료

기독교의 인간생명이해와 생명윤리에 갖는 함의 (2011.3.29)

회의간행물

등록일  2012.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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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 초청 세미나> 

 

 

3월_29일(화)_세미나요약문.pdf

 

 

- 주제 : 기독교의 인간생명이해와 생명윤리에 갖는 함의
- 연자 : 정종훈 교수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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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1년 3월 29일(화) 오후 12시 ~ 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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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신촌 세브란스병원 종합관 6층 650호 교수회의실



1. 들어가는 말


인간의 생명이 경시되는 시대이다. 각종 언론매체의 뉴스를 보면 수많은 생명들이 때로는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때로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이없이 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언론을 보면 살인의 기록을 세우기 위해 연약한 부녀자를 납치해서 성폭력하고 죽이는 극악한 범죄자도 있고, 10대 남자친구와 성관계 후 임신된 태아를 그저 방치하다가 출산하자마자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 죽이는 무지한 10대 소녀도 있고, 미국에서는 특별한 이유 없이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서 총기를 난사하는 정신병자도 있다. 그리고 아토피 피부가 쉽게 낫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목매달아 자살한 전도양양한 젊은이도 있고, 사랑을 나누던 불륜관계의 연인이 변심했다고 해서 복수심으로 그녀를 살해한 유부남도 있다. 또한 유명한 연예인으로 수많은 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다가 어느 순간 관심의 스포트라이트가 희미해지자 이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연예인들로 있다. 이러한 유형의 죽음들 말고도 다른 사람의 눈길을 끌지 못해 아예 다루어지지 않고 어두움의 저편으로 사라진 죽음의 경우도 우리 주변에는 수없이 많다.

도대체 그들에게는 인간의 생명이 어떤 것으로 이해되었기에 자신의 생명이든 다른 사람의 생명이든 그렇게 죽고 또 죽일 수 있었을까? 반면에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인간 생명의 의미를 바로 정립했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은 언론에 보도된 사람들과 같은 상황이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 생명을 그저 연장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모든 사건의 원인과 과정을 정확히 규명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적인 인간생명의 의미를 바로 알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타인이든 자신이든 인간의 생명 자체를 존중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살라는 명령으로 주어진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살 권리와 살 의무 그리고 살려야 할 책임만 있지, 죽을 권리나 죽일 책임은 없다고 보는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2. 기독교의 경전 성서가 말하는 인간의 생명


성서는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조성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야곱이 라헬에게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내가 하나님이라도 된단 말이오? 당신이 임신할 수 없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창 30:2) “주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사 49:1a)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 아담을 당신의 청지기로 삼으려는 계획 가운데 창조하셨고, 그의 아내 하와도 그를 돕는 배필로 계획적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죽었을 때 의인의 계열을 이으려는 계획으로 하와에게 셋을 잉태하게 하셨고, 이스라엘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에게 이삭의 임신을 허락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신약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구원이라는 계획 하에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당신의 구원사의 전체 그림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도록 세례 요한을 태어나게 하셨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은 주님에 대해서 “(자신을) 모태로부터 따로 세우시고 은혜로 불러 주신 분”(갈 1:15)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처럼 성서는 몇 사람을 상징적인 대표로 선정했을 뿐,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의도적으로 태어난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인간의 생명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성서는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 1:26-27a)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창 9:6)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생명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이 상상하는 가장 존귀한 존재보다 더 존귀한 존재임을 함축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생명은 그 어떤 인간에 의해서도 임의로 다루어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생명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영역 안에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살인을 강력하게 금하신 것은 인간의 생명이 인간 임의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처럼 존귀하게 받들어야 한다.


성서는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최고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 8:4-5) “주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생각하여 주십니까? 인생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하여 주십니까?”(시 144:3) 인간에 대한 최고의 연인은 다른 인간 가운데 존재하기보다는 인간을 당신 자신의 형상으로 계획하시고,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남김없이 주고 맡기셨을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을까? 아담에게 당신의 명령을 어기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정작 아담이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조차 당장 죽이는 것을 유보하셨다. 어떤 인간이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도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한다고 규정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카인이 동생 아벨의 피를 흘렸을 때에는 오히려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는 특별한 표를 제공하셨다. 세상의 관습과 법 앞에서는 당장 죽어야 마땅한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늘 생명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인간 자신보다 더 사랑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언제 어디서라도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성서는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마 16:26)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생명이 살아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인간의 생명이 사라진다면 사라진 생명 자신에게 세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가 피땀을 흘리며 평생 모은 재산도, 그가 쟁취하고자 그렇게 많이 노력했던 권력도, 그가 밤잠을 안자고 추구했던 학문도, 모든 사람의 선망이었던 그의 명성도, 그의 생명이 사라지면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자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생명의 존재 유무가 이렇게 엄청난 차이를 빚어내고 있기 때문에, 저울추에 생명의 가치와 세상의 어떤 것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무게 중심의 추는 인간의 생명 쪽으로 기울 것이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귀한 것보다도, 아니 온 세상보다도 인간의 생명 자체를 더 귀하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인간생명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생명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성서는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경우에도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읍들 가운데서 얼마를 도피성으로 정하여,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자가 그 곳으로 도피하게 하여라. 그 성읍들을 복수자를 피하는 도피처로 삼아서, 사람을 죽게 한 자가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기 전에 죽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살인자이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증인들이 있어야 한다. 오직 한 증인의 증언만으로는 어느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민 35:11-12, 30)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보호막을 마련하셨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위해 도피성이라는 첫 번째 보호막을 마련하셨고, 정당한 절차의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재판이라는 두 번째 보호막을 마련하셨으며, 재판 중에 인간의 생명이 임의로 판결되지 않도록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다는 세 번째 보호막을 마련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인 자를 반드시 사형에 처하라고 성서 도처에서 말씀하고 계시지만, 그것은 이미 사람을 죽인 자나 그에 의해 죽은 자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누군가를 죽일지 모르는 사람과 누군가에 의해 죽을지 모르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혔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던 여인의 생명을 보호하시고, 새로운 생명의 기회를 제공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이 생명을 살리는 것, 그리고 생명을 보호하는 것에 있지, 생명을 죽이는 것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성서는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이 그 주인이라고 말한다: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사 43:1)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마 10:29)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인간의 생명은 그 생명을 계획하시고, 인간에게 최초로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살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주신 그 분에게 속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거두실 수 있는 분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없다. 하늘을 나는 참새의 생명조차도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지 않으시겠는가?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시는 주체이심을 모르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생명이 자신의 것이라서 자기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모든 생명,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 모두에 대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최고의 가치로 존중해야 한다.


성서는 인간의 생명을 고난이나 고통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조상인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 47:9) 사도로 부름받아 신약성서의 대부분을 기록하고, 기독교를 우뚝 세운 바울조차도 비참한 삶을 경험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 7:24) 인간은 세상에서 사는 한, 고난이나 고통 앞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삶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이나 고통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삶을 파괴할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신앙 가운데서 올바로 인식하면 오히려 삶의 의미를 강화할 수 있다. 고난이나 고통은 모든 인간의 삶에 있어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극심한 고난이나 고통 때문에 죽여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생명을 죽여 달라는 진심의 요구라기보다는 고난과 고통을 없애달라는 절박한 요청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성서를 보면 인간 자신의 죄가 원인이 되어서 야기된 인과응보적인 고난이나 고통이 있고, 인간 자신의 죄와는 상관없이 인간을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성숙시키려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연단의 고난이나 고통이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스스로 걸머지는 대속의 고난이나 고통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난이나 고통에 직면할 때에 절망하기보다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인정하면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는 회개의 기회로 삼고, 하나님의 배려에 감사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의 고난이나 고통을 이해하는 기회로 삼고, 나아가 누군가의 고난이나 고통을 함께 나누기로 결단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성서는 인간의 생명을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창 2:17)라고 선언하셨다. 이 선언은 이미 선악의 열매를 먹어버린 모든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밝히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창 6:3)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인간은 사는 년수의 차이가 있지만, 그 생명은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 있다. 인간의 생물학적인 생명은 세상에서 언젠가는 죽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어떤 인간도 피할 수 없는 창조질서의 한 부분이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 죽음이 있음으로 인해 인간은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수용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처럼, 인간의 죽음 역시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는 자연스런 과정이다. 그러나 생명의 자연스런 마침인 죽음을 인간 스스로 인위적으로 결정하는 자살이나 타살은 부자연스런 죽임이 된다. 죽임은 자연스러운 죽음과 달리 억지스런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죽임을 거부하는 과제와 죽음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과제 모두를 지니고 있다. 반면에 죽음의 시간을 얼마간이라도 인위적으로 연장시키는 노력이 죽음에 직면한 사람과 그 가족에게 죽음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기회가 된다면, 그 노력은 의미가 있겠지만, 죽음 자체가 두려워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려는 것은 불신앙의 태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의 자연스러움을 인정하되, 억지적인 죽임과 억지스런 생명연장은 언제라도 거부해야 한다.



3. 인간의 생명을 위한 생명윤리의 과제


생명윤리는 인간의 생명이 언제부터인지를 생명의 존엄성 차원에서 규정해야 한다. 생명의 시작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가 수정되어 자궁에 안착된 순간이다. 물론 수정란으로부터 10개월이 지나야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자궁에서 성장하는 연속된 10개월의 과정 중 어느 한 순간도 생략될 수 없고, 어느 순간이 다른 순간보다 더 중시되거나 더 소홀히 취급될 수 없다. 10개월의 연속된 시간 동안 동일한 인간의 동일한 생명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생로병사의 변화무쌍한 과정을 겪게 되지만, 어떤 순간에 처하더라도 동일한 생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윤리는 미성숙한 어린아이의 생명이든 장성한 어른의 생명이든, 더 이상 생산능력이 없는 나이 지긋한 노인의 생명이든, 인간의 생명은 연속된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생명 존엄성의 정도를 달리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생명윤리는 인간의 생명이 언제 끝인지를 생명의 존엄성 차원에서 역시 규정해야 한다. 일반적인 정서로 볼 때, 인간 생명의 끝은 심장이 멈추어 더 이상 호흡하지 심장사(心腸死)의 순간이다. 그러나 의학적으로나 법률적으로는 뇌의 기능이 멈춘 뇌사(腦死) 상태를 죽음의 순간이라고 본다. 이 때 사람의 심장은 뇌사 이후에도 최장 7-14일간 뛸 수 있기 때문에 뇌사와 심장사의 시기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사실 뇌사를 인정한다는 것은 아직 심장이 멎지 않은 상태라도 죽은 것으로 본다는 뜻이며, 이는 죽음에 대한 일반 정서를 뒤엎는 판단이다. 그러나 뇌사자는 인공호흡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호흡하는 것이 어려우며, 나중에 의식을 회복해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일은 기대할 수 없다. 문제는 뇌사판정이 얼마나 정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판단은 언제나 오판의 가능성과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성급한 뇌사판정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명윤리는 뇌사판정이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는 명확한 기준을 세심하게 마련해야 한다.


생명윤리는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거나 도구화하는 경우를 거부해야 한다. 인공수정이나 인공유산은 인간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인공수정은 불임부부나 자녀를 정상적으로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자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기술적으로 제공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녀란 부모가 만들어내는 작품이거나 부모의 욕망을 관철시키는 수단이 아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떤 부부에게 자녀를 주시면 감사한 것이지만, 불임 등의 여러 이유로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이 신앙이다. 반면에 인공유산이란 이미 임신된 태아에게 인위적인 조작을 가함으로 더 이상 생명이 진행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일단 수정되어 자궁에서 성장하고 있는 태아는 태어난 생명과 동일한 생명의 연속 과정에 있다. 이미 태어난 생명을 인위적으로 멈추게 한다면 살인이 되듯이, 자궁의 생명이라도 인위적으로 멈추게 한다면 살인의 동일한 범주에 있게 된다. 한편 불치의 환자를 치료한다는 미명 아래 다른 사람의 매매된 장기를 이기적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다른 생명을 도구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모든 생명은 예외 없이 존엄한 생명으로서 존재해야 할 당위성이 있는 존재인데, 어떤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키거나 도구화 한다면, 다른 생명을 통해 존재하게 된 어떤 생명도 언젠가는 누군가를 위해 희생되거나 도구화 되어도 무방하게 된다. 그러면 결국 세상의 모든 생명은 자기보다 강한 자의 생명을 위해서 희생되거나 도구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윤리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 생명을 하나님의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


생명윤리는 인간생명의 차별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모든 인간은 유일하기에 존귀하다. 인간의 존엄성과 존재해야 할 이유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인격체라는 점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사람의 생명이나 사회적인 혜택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의 생명이나 동일한 생명이다. 돈이 많은 사람의 생명이나 가난한 사람의 생명이나 동일한 생명이다. 장애가 있는 사람의 생명이나 장애가 없는 사람의 생명이나 동일한 생명이다. 백인의 생명이나 흑인의 생명이나 동일한 생명이다. 한국인의 생명이나 미국인의 생명이나 동일한 생명이다. 기독교인의 생명이나 이슬람교인의 생명이나 동일한 생명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의 생명이나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의 생명이나 동일한 생명이다. 능력의 차이가 있고, 빈부의 차이가 있고, 장애의 차이가 있고, 얼굴색의 차이가 있고, 국적의 차이가 있고, 종교의 차이가 있고, 지적 능력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모든 인간의 생명은 동일한 생명이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동일하게 존엄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다. 누군가 인간의 생명을 차별할 때 흑인이 노예가 되는 일이 벌어진다. 십자군 전쟁과 유사한 종교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유지한다면서 약자들의 생명을 죽음으로 몰게 된다. 우생학이라는 학문이 그럴듯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자신과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게 된다. 다른 것은 다른 만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조건이자 자기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기회인데, 다르다고 차별하는 순간 인간의 세상은 약육강식의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생명윤리는 인간의 차이를 인정하되, 풍성함의 기회로 삼고, 인간생명을 차별하지 않는 보루가 되어야 한다.


생명윤리는 인간의 생명이 예수께서 부여하신 충만한 생명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생명을 위하는 세상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자연의 생명을 위협하고 죽이는 세상으로 되고 있다. 게다가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만 살겠다는 약삭빠른 생각을 가지고 자기 이외의 다른 생명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심으로 살고 있다. 지금 세상이 이대로 지속되고, 사람들이 자신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인간도 세상도 머지않아 멸망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에게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라”(신 30:9)고 요구하신다. 죽임을 강요하는 세상과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생명을 위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히 설정하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모두가 생명의 충만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요 10:10)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전인적인 존재로서 물질적인 풍요 이상의 질적으로 고양된 삶, 하나님의 궁극적인 평화와 영원한 생명에 접맥된 삶이 되도록 보증하셨다. 그러므로 생명윤리는 모든 인간의 생명이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별반 없는 상태로 방치되지 않고, 충만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4. 나가는 말


인간의 생명을 증진시키는 일은 모든 사람의 과제이다. 모든 사람은 서로 밀접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온생명이다. 전체 생명으로서의 온생명을 구성하는 자신의 개체 생명은 다른 사람의 개체 생명이 손상될 때, 시간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어이 손상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개체 생명을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개체 생명을 존중해야 하고, 나아가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다른 사람의 개체 생명을 위해서라면 희생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위한 길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직접 다루어야 하는 의료인은 무엇보다 생명에 대한 바른 이해를 지녀야 한다. 모든 의료인은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 대하듯이 다루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그 누구의 생명이라도 동등하다. 생명을 다루는 과정에서 부귀나 명예나 권력 등의 다른 변수가 작용해서는 안 된다. 의료인은 약자인 환자 앞에서 권위적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문성을 믿고 환자의 풍성한 삶의 증진을 위해 맡기신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의료인은 스스로 하나님의 파트너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의료직을 숭고하게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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