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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논설 - [분수대]

[분수대] 5월이 찬란한 것은 스러지는 것이 있기 때문 ‘삶의 소풍’ 귀갓길도 품위 있어야

 

[중앙일보]입력  2012.05.01 00:00 / 수정 2012.05.01 00:00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계절의 여왕 5월이 시작됐다. 나뭇잎들은 연녹색에서 진한 초록으로 물들면서 여름 맞을 채비에 들어갔다. 화창한 지난 주말 나는 아흔셋 연세의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 병원 위 하늘도 예외 없이 푸르렀지만 건물 안 공기는 사뭇 달랐다.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 얼굴에도 걱정이 주렁주렁했다. 다 나아 퇴원하는 환자·가족도 그러지 못한 남들을 생각해 웃음소리를 삼갔다.

 스러지는 것들이 있기에 5월이 한층 더 찬란하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귀천’)는 독백은 천상병 정도의 내공이니 가능하다. 보통사람에게 인생 소풍의 귀갓길은 그지없이 버겁고 고단하다. 돈만 따져도 그렇다. 환자가 숨지기 전 1년 동안 부담하는 병원 진료비는 평균 1099만원으로 일반 환자의 14배라는 통계(건강보험심사평가원)도 있다. ‘100세 수명에 대비하자’는 화두가 유행이지만 보험·연금 같은 노후 대비와 건강 비결에만 관심이 몰린다. 마지막 100세에 대해서는 언급하기 꺼린다. 화룡점정(<756B>龍點睛), 가장 중요한 대목인데도. 게다가 100세는 인가라도 받았나. 눈동자를 그려 넣는 순간은 30세든 50세·70세든 언제나 찾아올 수 있다.

 생명윤리를 연구하는 독립 연구기관인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이 지난달 25일 공식 출범하면서 세미나를 열었다. 주제는 ‘한국에서의 연명치료 중지, 어디로 가야 하나’. 연세대 이일학(의료법윤리학) 교수 발표에 따르면 중환자실이 있는 211개 병원의 입원 환자 중 연명치료 중단을 고려하는 사람은 1169명이었다. 그러나 연명치료 보류·중지를 결정한 병원은 7곳(3.32%)에 불과했다. 조사에 응하지 않은 병원들도 있으니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하는 말기 환자는 더 많을 것이다. 병원이나 의사 탓을 할 상황이 아니다. 사회적 논란이 정리되지 않았고 국회도 입법을 미루고 있다. 독일·오스트리아는 환자의 결정이 비합리적이고 사망할 가능성이 있더라도 환자의 뜻에 반하는 의료행위를 하지 못한다(이석배 단국대 교수). 우리는 그랬다간 애먼 의사만 쇠고랑 찬다.

 일본 의사 야마자키 후미오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과 품위 있는 죽음을 역설한 베스트셀러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을 쓴 것은 의사 생활 8년차 때 미국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1926~2004)의 『죽음과 죽어감』을 읽고 감명받아서였다. 야마자키는 실화로 엮은 자신의 책에서 “죽음이 확실해졌을 때는 ‘절대로 무의미한 소생술은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죽게 해주세요’라고 가족과 의사에게 반드시 말하라”고 충고한다. ‘소풍 끝나는 날’에 대해 각자 스스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좀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들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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