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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22년전 죽은 엄마의 일부가 세상에 살아있다니

중앙일보 원문 기사전송 2012-04-08 00:27 최종수정 2012-04-08 09:46

암으로 숨진 흑인여성 세포 배양
소아마비 백신 등 의학산업 활용
가족은 22년간 까맣게 몰라
과학 발전 명분, 또 이용당해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
레베카 스클루트 지음
김정한·김정부 옮김
문학동네, 512쪽
1만8000원


5000만t의 세포로 남은 엄마. 그리고 지금도 자라고 있는 엄마의 세포. 1973년 미국 볼티모어에 살던 랙스 가족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22년 전 땅에 묻은 엄마의 일부가 살아 있다는 것. 엄마 세포가 이 세상만큼 자라 지구를 다 덮을 정도라는 이야기였다.

세계 최초로 배양된 불멸의 인간세포인 헬라세포의 주인인 헨리에타 랙스. [사진 문학동네] 그들의 엄마는 헨리에타 랙스. 그는 미국 볼티모어에 살던 평범한 주부로 한 남자의 아내이자 다섯 아이의 엄마였다. 1951년 자궁경부암으로 세상을 떠나며 헨리에타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특별할 것 없는 필부(匹婦)의 죽음이었다.

 하지만 헨리에타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일부는 살아 있었다. 그의 자궁경부에서 떼어낸 세포가 미국 존스홉킨스대 조지 가이 박사의 연구실, 배양액이 든 시험관 안에서 무서운 속도로 분열하고 증식해온 것이다. 헨리에타 랙스의 첫 글자를 따 헬라(HeLa)세포로 명명된 엄마의 세포는 세계 최초의 불멸 인간 세포가 됐다.

 헬라세포는 암세포다. 암세포는 영양분만 있으면 무한정 분열할 수 있다. 암세포가 불멸의 생명력을 얻은 것은 텔로머라제라는 효소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세포가 분열할 때 ‘세포 내 노화시계’인 텔로미어(telomere)의 길이가 짧아지며 세포 분열을 멈추게 되지만 텔로머라제는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지지 않도록 활성화하는 것. 똑딱 시계의 태엽을 계속해서 되감는 셈이다.

 헬라세포의 등장으로 현대 의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신약을 개발할 때 인간을 대상으로 할 수 없었던 실험이 가능해졌다.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고 인간의 염색체가 46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도 모두 헬라세포 덕이다. 동시에 헬라세포는 인체에서 나온 생물학적 실험 재료를 사고 파는 의학산업이 본격화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형광염색해 공초점 현미경으로 촬영한 헬라세포(왼쪽 사진). [사진 문학동네]
 불멸의 헨리에타 세포가 갈색 병에 담겨 전세계 연구실을 누비며 생명공학회사의 배를 불리고 의학의 발전을 이끌었지만 그 동안 가족은 아무것도 몰랐다. 어린 시절 엄마를 잃은 그의 아이들은 계모의 학대와 방치 속에 망가졌다. 노숙자가 되고 범죄자가 되고 가난에 시달렸다.

헨리에타 랙스의 딸 데버러와 막내 아들 제카리아가 현미경으로 헬라세포를 보고 있다. [사진 문학동네] 의학과 생명공학계를 발칵 뒤집은 사건만 없었더라면 헨리에타의 이름은 의학사의 뒷골목으로 아마도 모호하게 묻혔을터다. 하지만 헬라세포가 다른 세포주를 오염시켜 각종 신약 개발 연구를 무용지물로 만들 위기에 처하자 의학계는 헬라세포의 원주인인 헨리에타의 DNA 정보 확보에 나선다. 죽은 지 22년 만에 헨리에타의 직계 가족에게 연락하고 암검사 명목으로 가족의 혈액을 채취한다.

 그들의 목적은 동의 없이 조직을 채취해 상업화한 것에 대한 사과도, 헨리에타에 대한 감사도 아니었다. 과학 발전이란 명분하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세포의 주인과 가족은 모든 과정에서 배제되고 오히려 이용당하고 희생됐다.

1940~50년대 실험실에서는 배양액을 직접 제조해야 했다. 헬라세포가 배양된 뒤에는 이미 제조된 배양액을 우편으로 주문할 수 있게 됐다. [사진 문학동네] 가족은 분노한다. “존홉킨(존스홉킨스)은 우리에게 아무 정보도 안 줬어. 그것이 나쁘다는 거여. 슬프기보담은 나쁜 거. 어머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는디, 가족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잖어. 엄마가 과학에 그렇게 중요하믄 왜 우린 의료보험도 없냐구”라는 딸 데버러의 항변은 그래서 서글프다.

 책은 현대의학사를 다시 쓰게 했지만 모두 무관심했던, 혹은 모른 척 했던 헨리에타의 이야기를 10년여 추적한 논픽션 작가인 저자의 집념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1950년대 존스홉킨스 흑인 병동에서부터 헬라세포의 그늘에 멍들어간 헨리에타 가족의 모습까지 시공을 넘나든다.

헨리에타 랙스의 사망진단서. 직접 사인은 요독증. 중간선행사인은 자궁경부암으로 기록돼 있다. [사진 문학동네] 우리도 ‘또 다른 헨리에타’가 될 수 있다는 의학연구 윤리에 대한 문제 의식도 던진다. 저자는 “오늘날 상당히 많은 미국인의 신체조직이 어딘가에 보관돼 있다”며 “의사에게 가서 일상적인 피검사를 하거나 점을 제거할 때, 맹장수술, 편도선 절제술, 또는 여타 제거수술을 받을 때, 병원에 남겨둔 조직이 항상 폐기 처분되는 것은 아니다. 의사나 병원, 실험실이 그것들을 종종 무기한으로 보관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몸에서 채취한 신체 조직의 연구와 관련한 사전 동의와 경제적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책에 담긴 아프리카계 미국 흑인을 대상으로 했던 과학실험의 음울한 역사는 이름없는 무수한 사람들의 희생 속에 의학 발전이란 탑이 쌓여왔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그런 까닭에 책의 머리에 저자가 인용한 엘리 위젤의 『나치 의사들과 뉘른베르크 강령』중 한 구절이 더 절실하게 와 닿는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 추상적 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대신,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유의 비밀과 보물을 간직한, 저마다 합당한 번민의 이유와 성공의 열쇠를 품은 하나의 우주로 보아야 한다.”

“미국연수중 우연히 알게된 책
내가 해야겠다는 사명감 생겨”

번역자 김정한 교수


겁도 없이 헨리에타 랙스의 삶에 빠져든 형제. 헨리에타의 이야기를 한글로 옮긴 김정한(42) 한림대 의대 교수와 동생인 김정부(40) 일본국제대 교수다. 책의 번역이 ‘나만의 사명감’에서 비롯된 작업이었다고 밝힌 김정한 교수와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는 혈액종양내과 전문의로 강남성심병원 항암센터장을 맡고 있다.

-번역한 계기는.

 “책이 2010년 미국에서 출간됐을 때 미국 시애틀 프레드허치슨 암연구소에서 연수 중이었다. 북 투어를 하던 저자 레베카 스클루트가 연구소에서 강연을 했는데 우연히 듣게 됐다. 퇴근길에 바로 책을 사봤다. 당시 책은 미국 내에서도 반향이 컸던 데다 한국에서도 신체 조직 연구 문제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동생도 흔쾌히 번역 작업에 동의했다.”

-출판사에 직접 연락했나.

 “먼저 출판 에이전트사에 접촉했다. 한국에 판권이 팔렸다고 해 출판사에 연락해 번역하고 싶다고 했다. 이 분야를 아는 사람이 제대로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의학사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는 책이다. 의사로서 부담스럽지 않았나.

 “헬라세포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었다. 헬라세포를 배양했던 1950년대의 의학 윤리나 법률 수준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가장 처음 헬라세포를 배양했던 존스홉킨스대 조지 가이 박사가 경제적 이익을 취한 것은 아니다.”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지난해 11월 생명윤리법 개정안이 통과되는 등 신체 조직 연구와 관련해 국내에서도 법적인 부분이 많이 정비됐다. 환자 등 인간의 몸에서 채취한 신체 조직에 대한 소유권과 통제권, 경제적 이득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연구와 상충하는 측면이 있다. 환자의 권익이 보호되는 방향으로 가야겠지만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다. 신체 조직을 이용한 연구를 법적인 틀에 묶어 놓으면 연구가 위축될 수 있다. 그 간극을 줄일 필요가 있다. 이 책이 연구와 인권 사이의 생산적 논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헬라세포 외에 배양된 다른 ‘불멸’ 세포는.

 “굉장히 많은 종류의 암세포가 배양돼 있다. 서울대에서 배양한 위암세포주도 있다. 헬라세포처럼 전 세계적으로 쓰이는 것도 있다. 1950년대만 해도 배양 조건을 몰라서 많은 종류를 배양하지 못했던 거다. 헬라세포는 어디서나 잘 사는 세포다. 악성도가 아주 강한 암세포라 할 수 있다. 지금도 가장 많이 쓰이는 세포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자료출처 : http://news.nate.com/view/20120408n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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